햇병아리 기자 시절 1988년 서울올림픽을 취재했다. 올림픽 개최는 군부독재의 정통성 부재를 가리려는 술책이라고 생각한 햇병아리 기자의 비판적 사고는 희석됐다. 젖과 꿀이 흐르는 취재였다.
암표가로 몇백달러 하는 인기 경기장도 수시로 출입하며 말로만 듣던 유명 스포츠 스타들의 멋진 몸과 기예를 눈앞에서 볼 수 있었다. 온몸 근육이 폭발하듯 달리던 칼 루이스와 벤 존슨의 100m 달리기, 여자 육상 스타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의 형형색색 화장과 근육, 여자 수영 6관왕 크리스틴 오토 등 동유럽 여자 수영선수들의 남성적 여성미, 손에 땀을 쥐게 한 미국과 소련의 농구 대결…. 축하공연을 하러 온 모스크바 볼쇼이 발레단원들은 지금도 선녀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경찰도, 공무원들도 올림픽 아이디카드 앞에서는 눈을 감았다. 올림픽 관계자들은 차량 짝홀제 운행으로 텅 빈 서울 거리를 누비며 유명 특급호텔들을 찾아다녔다. 개최 한달 전부터 특급호텔들의 연회장은 올림픽 관련 행사로 붐볐다. 올림픽 관련 각종 회의와 연회 일정을 담은 책자는 올림픽 관계자들에게 필수품이었다. 입맛에 맞는 연회를 찾아다니며, 당시 4만~5만원 하던 특급 뷔페와 식사를 대접받았다. 각종 기념품도 필수였다.

올림픽 역사상 서울올림픽은 가장 인심 좋고 흥청거렸다. 지금은 고급아파트로 변한 송파 일대의 올림픽 선수촌과 기자촌의 하루 숙박비는 20달러 안팎. 그 뒤 바르셀로나와 애틀랜타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기자들의 하루 숙박비가 200~300달러 한 것에 비교하면 거저 재워주고 먹여줬다. 올림픽 취재를 수십년 한 외신기자들은 연방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한국이 최고’라고 입을 모았다. 문제는 그 엄지손가락 뒤 표정에서 퍼지는 ‘봉 잡았다’는 느끼한 미소들이었다.

22년이 지났다. 주요 20개국(G20) 서울정상회의로 한국이 다시 서울올림픽 분위기이다. 전국민 동원체제인 것은 같지만, 그때는 손님들을 향한 흥청망청이고, 지금은 국민을 상대로 한 일사불란이다. 텔레비전을 틀면 날마다 G20 타령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기피하던 공식 기자회견을 1년1개월 만에 하면서 국격을 높이고 국운을 올리는 기회라는 소리를 반복했다. ‘국격 상승’이 이번 회의의 주제인 것처럼 느껴진다.

앞서 정부는 G20 회의 때 손님을 모셔놓고 시위하면 실례라며, 집시법 개정과 음향포 도입을 추진했다. 직전 G20 회의가 열린 캐나다 토론토에서는 20만명이 모여 각종 시위가 벌어져, 600여명이 체포됐다. 99년 세계무역기구 시애틀 각료회의는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시위대들로 사실상 회의가 무산됐다. 이 시위는 ‘시애틀 전투’로 불리며 반세계화 운동의 이정표가 됐다. G20의 전신인 G7부터 시작해 세계무역기구 회의 등 글로벌 회의는 이제 ‘글로벌 시위’의 무대가 된 지 오래다. 시위 벌어졌다고 주최국의 국격이 낮아지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 때 아시아유럽정상회의(아셈)와 월드컵, 노무현 정부 때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아펙) 회의 등 굵직한 글로벌 행사를 치렀으나, 이렇게 호들갑 떨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가 내세울 것이 너무 없으니 ‘안으로 4대강, 밖으로는 G20’이라는 말도 나온다. 4대강과 G20이 내치와 외교의 최대 업적이라는 거다.

상다리 부러지게 차리고 쥐 잡듯 집안 식구 총동원해 시중들게 한다고 손님한테 존경받는 것은 아니다. 오죽하면 외신에서 ‘어린이에게 환율을 숙제로 낼 정도로 G20 광기가 서울을 장악했다’라는 기사까지 나오겠는가. 서울올림픽 때 외신기자들은 ‘봉 잡았다’는 속내를 보였지만, 이번 G20 서울회의 때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재확인했다는 비아냥을 들을까?

서울올림픽 때야 멋진 스타들의 기예라도 볼 수 있었지만, 이번 G20 회의 때는 감흥 없는 각국 정상과 정치인들을 위해 국민동원체제에 국민으로서 동원되려니 짜증이 앞선다.


2010-11-04, 한겨레신문, 정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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