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기름유출 사건에 대한 검찰의 중간수사 발표가 나왔다. 삼성중공업 예인선단의 무리한 항해와 유조선의 대응 조처 미흡으로 사고가 일어났다는 게 요지다. 삼성중공업의 무리한 운항 지시나 운항 관례에 대한 수사는 이뤄지지 않아 삼성중공업이 무한 보상책임을 져야 할 것인지 여부는 뒤로 미뤄졌다.
결국 삼성은 시늉만 내고 거대한 부담은 국민 세금으로 돌려지지 않을까 우려되지만, 아무튼 ‘책임 있음’을 분명히한 검찰 발표로 한달여 온나라가 떠들썩했음에도 계속 눙치던 삼성도 더는 모르쇠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22일치 아침신문마다 ‘머리 숙여 사과드립니다’라는 사과문을 실었다. “이제 긴급 방제가 마무리되는 상황에서 …”라고 밝힘으로써 늦어진 사과의 배경을 검찰 발표 시점과 분리시키는 영민함을 보였다. 삼성중공업 대표이사와 임직원 일동 이름으로 된 사과문은 전국 신문에 두루 실렸는데 <한겨레>만 제외되었다. 이미 한겨레 지면에서 석 달째 삼성 광고가 사라졌는데 이번 대국민 사과 광고도 싣지 않은 것이다.

한겨레로선 특정 기업이 광고를 하지 않겠다는 데야 별 도리가 없다. 한국을 대표하는 1등 기업에 어울리지 않는 옹졸함을 확인해 왔을 뿐이다. 하지만 상품 광고와 사과 광고는 다르다. 한겨레 독자라는 이유로 사과받는 대상으로서 국민·지역민에서 제외된다면 그 진정성이 훼손된다는 점을 모를 만큼 어리석은 ‘삼성맨’들이 아니다. 신문은 그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했는데, 광고 하나가 ‘삼성공화국’이 아니라 1인 지배체제의 ‘삼성제국’임을 알게 해준다는 점에서도 아주 정확한 말이다. 그렇다고 하여 길들여질 한겨레가 아님을 분명히해야 할 것이다. 또 삼성에 대해 지금까지와 다른 논조를 보일 만큼 ‘삼성스러워도’ 안 될 것이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지금까지 해 온 대로 진실과 사실에 바탕을 두고 공정한 기사를 쓰면 된다.

오늘날 광고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매체들한테 삼성은 감히 맞설 수 없는 존재다. 시장 권력은 과거 권위주의 정치권력보다 부드러워진 만큼 강력하다. 과거 정치권력에는 사회구성원들이 어쩔 수 없이 복종했지만 오늘날엔 자본과 돈 앞에서 자발적으로 복종하기 때문이다. 정치권력이 앞장서서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역설하고, 기업이 나라 경제를 떠받들고 노동자를 먹여 살린다는 주장 앞에 노동자는 노동의 가치와 함께 한없이 초라해진다. 노동자의 일자리 창출과 국가경제에 대한 소명이 진정으로 기업의 고민거리가 되고 있는지는 차치하고라도, 기업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사회적 책임의식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한겨레는 노동의 가치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노사 균형이 무너진 사회,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는 사회, 그런 자본과 돈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경제동물의 사회는 병든 사회임을 지적하고 비판할 뿐이다. 그 대상이 삼성제국이라고 할지라도.

이번 사건에서도 국민은 시커먼 기름으로 뒤덮인 바다에 애달파하고 백만을 헤아리는 자원봉사자가 추위를 무릅쓰고 기름수건을 들고 허둥댔다. 종내는 절망한 어민과 주민 셋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작 책임을 통감해야 할 기업은 옹졸하면서 오만했다. 광고로 묶인 매체들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 대신 한국인의 저력에 또 한 번 외국이 놀란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한겨레가 기름수건을 들고 안간힘 쓰는 서민들의 아름다운 모습에 마음 편히 감동하는 데 머물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2007-01-23, 한겨레신문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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