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첨단 음향반사판도, 멋있게 치장한 음악애호가들이 삼삼오오 모여 공연 평을 주고받는 화려한 로비도 없었다. 수천 명을 수용하는 안락한 대극장도, 세계 최고 권위의 극장도 아니었다.

10일 오후 7시 반 서울 중랑구 면목동 중랑구민회관, 명색이 ‘대공연장’이지만 강당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 무대에 세계 최정상의 ‘마에스트로’ 정명훈 씨가 올랐다. 이날은 정 씨가 예술감독이자 상임지휘자를 맡고 있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이 구민회관으로 찾아가 벌이는 신년음악회의 첫날.

정 씨의 손이 올라가며 베토벤 교향곡 1번 1악장이 시작됐다. 이날 연주곡은 교향곡 1∼3번의 1악장, 그리고 5번의 1, 4악장. 한 악장이 끝날 때마다 관객들은 열광적으로 박수를 쳤고 정 씨는 그때마다 단원들을 모두 일으켜 세워 인사했다. 80여 명의 서울시향 단원이 모두 서기에는 무대가 비좁아 이날은 60명만 연주에 참가할 수 있었다. 곡 해설을 맡았던 서울시향의 오병권 공연기획팀장은 “관객 여러분의 박수 수준은 빈이나 뉴욕의 큰 무대에 어울릴 만하다”고 답례했다.

무료로 진행된 이날 공연의 티켓은 2일 인터넷 예매가 시작된 지 10분 만에 모두 동났다. 반환표를 기대하고 이름을 올려놓은 대기자만 400명이 넘었다. 결국 중랑구청 측은 이날 통로에 180석의 보조의자와 방석을 깔아 추가 입장시켰고, 그마저 구하지 못한 50여 명은 맨 뒤에 선 채로 총 600여 명이 공연을 감상했다.

초등학생인 두 아들과 함께 공연을 보러 온 주부 최경주(41·중랑구 신내동) 씨는 “공연장도 멀고 음악회 티켓 가격도 만만치 않아 음악을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공연을 보여 줄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이렇게 동네까지 와서 공연해 주니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1시간에 걸친 공연이 끝나자 객석에서는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정 씨는 “시설 좋은 대극장에서 공연하다가 구민회관에서 공연하려면 힘들지 않으냐”는 기자의 질문에 “서울시향의 첫 번째 책임은 시민을 위해 연주하는 것인 만큼 세종문화회관까지 오시지 못하는 분들에게는 찾아가서라도 음악을 들려 드리는 것이 우리 의무”라며 “일단 음악이 시작되면 장소의 의미는 대극장이든 구민회관이든 똑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시멘트벽의 구민회관이었지만 세계적 무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최선을 다한 지휘자 정 씨와 서울시향의 연주는 시민들의 가슴에 아름다운 울림을 남겼다.

2006-01-11, 동아일보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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