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9일 두산그룹 비리의 주범인 박용성 회장을 포함한 4형제를 모두 불구속 기소하기로 한 것을 놓고 ‘고질적인 재벌 봐주기’라는 비난이 일고 있다.

  “재벌 봐주기”=검찰은 박 회장의 4형제에게 모두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특경가법)을 적용했다. 횡령 또는 배임 액수가 50억원 이상이면 적용되는 이 조항의 법정형은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중형이다. 그만큼 죄질이 나쁘다는 뜻이고, 실형이 선고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도주 우려가 있다고 봐야 한다.

  검찰은 “구속은 처벌이 아닌 수사기법상의 한 형태일 뿐”이라며 “공소유지에 최선을 다해 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으면 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이는 구속과 관련해 지금까지 검찰이 펴온 논리와 크게 다르다. 검찰이 불구속 기소한 사건에 대해 법원에서 실형을 선고하는 경우도 드물다. 게다가 재벌 사건은 구속 기소돼도 법원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경우가 많다. 박 회장 등도 검찰의 공소사실이 다 인정되더라도 정상 참작으로 법정 최저형인 5년형의 절반까지 형량이 줄 수 있다. 이 경우 3년 이하의 징역형에 대해서는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있기 때문에 박 회장의 형제들은 법정구속을 피할 수 있다.

  검찰의 이번 결정은 에버랜드 편법증여 사건 등 현재 검찰이 수사 중인 재벌 비리 관련 사건뿐 아니라 일반 사건들에도 심각한 선례를 남길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경가법이 적용되는 중죄인을 불구속한 마당에 이제 누구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참여연대는 이날 논평에서 “검찰이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과 박건배 해태그룹 회장, 김선홍 기아그룹 회장 등 ‘죽은 재벌’에 대해서는 구속 수사를 한 반면, 두산처럼 ‘살아있고 힘있는 기업’에 대해서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 변호사는 “두산보다는 앞으로 삼성을 의식한 결정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수사팀과 수뇌부 갈등설=수사팀은 애초 박용성 회장을 구속 기소해야 한다는 의견을 수뇌부에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검찰 수뇌부는 박 회장을 구속할 경우 형제간 분쟁에 검찰이 이용당하는 측면이 있고, 동계올림픽 유치 등 국익에 영향을 준다는 점 등을 이유로 수사팀과 다른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이 사건의 진정인인 박용오 전 회장 쪽이 애초 구속을 각오하고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뜻을 보였는데, 시간이 갈수록 변질된 것 같다”고 말했다. 수뇌부는 또 박용성 회장이 맡고 있는 국제상공회의소(ICC) 소장이 국익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중요한 자리라는 논리로 수사팀을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특수부 출신의 한 검사는 “이런 사건일수록 검찰이 법대로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며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이라도 법을 어기면 엄하게 처벌하는 것이 오히려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다른 검사도 “또다른 올림픽위 위원인 이건희 삼성 회장도 피고발인으로 수사 대상에 올라 있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고 말했다. 또다른 검사는 “이제 누구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할 수 있을지 혼란스럽다”고 자조했다. 특수부 출신의 한 변호사는 “수뇌부가 수사팀 의견과 다른 결정을 내렸다면, 수사팀이 사표로 저항해야 할 사안”이라며 “장관의 수사지휘에 저항한 검찰이 이런 결정을 내린 게 맞느냐”고 되물었다.

  검찰의 이번 결정은 강정구 교수 사건에 대한 천정배 법무부 장관의 불구속 수사지휘도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강 교수 사건은 중형이 예상되지 않아 도주 우려가 없어, 이 사건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천 장관도 사석에서 “강 교수 사건은 피의자가 한 명이지만, 이 사건은 피의자가 여럿이고 이들이 입을 맞추면 증거인멸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는 견해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2005-11-09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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