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에게 인간이란 더러운 강물이었다. 그래서 그의 초인은 자신을 더럽히지 않은 채 이 더러운 강물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려고 스스로 바다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강신욱 대법관에게 대표로 퇴임사를 낭독하게 한 다섯 사람의 퇴임 대법관의 생각은 이와 달랐던 모양이다.
이들은 참여연대의 판결 비평사업이 내내 걸렸던 듯, “선고된 판결에 대해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보수니 진보니 걸림돌이니 디딤돌이니 하면서 원색적이고 과격한 언동으로 비난한다”고 개탄하면서 “이런 행위는 사법권의 독립을 저해하는 우스운 현상”이라는 낙인찍기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법권 독립이란 ‘우리 사법부는 보수의 편도 아니고, 진보의 편도 아니며, 오로지 법과 정의와 양심의 편일 뿐’이라는 외침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외침을 가리개 삼아 사법 민주화를 향한 시민사회의 요구에 귀를 막고 스스로 국민 위에 군림하는 사법권력이기를 꾀하는 그 해묵은 음모가 더 문제다. 이들은 사법권 독립을 사법 관료들이 만들어 내는 법 도그마의 독립으로 간주하고, 사법권을 대법원과 대법관을 정점으로 하는 일사불란한 지휘감독 체계와 동일시한다. 그래서 결국 그들의 ‘사법권 독립’이란, 대법원의 결정으로 하여금 모든 법관의 일상까지도 지배하며, 그에 대한 어떤 비판과 개혁요구도 용납되지 않는, 절대신성의 신탁이 되도록 함을 의미할 따름이다.

실제 유전무죄니 전관예우니 하는 세간의 비난들을 정작 법관들은 실감하지 못하는 상황도 이에 연유한다. 그런 폐습조차 이미 하나의 ‘아비튀스’(계급·계층에서 비롯한 습속)가 되어 사법부의 그 신탁으로 편입되어 버린 것이다.

사법권의 독립이 대법관들의 관료적 독재로 이행하는 그 이상한 가역반응은 여기서 가동된다. 그들은 ‘법과 정의와 양심’이라는 말을 애용하지만 그것이 누구의 것이어야 하는가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국민을 내세우고 인권을 거론하지만, 내심으로는 국민은 곧 사법 관료를, 인권은 사법 권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단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서 누구도 사법권은 건드려서는 아니 된다는 사법권 독립의 신화가 형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법관들을 그 정치적 성향에 따라 보수니 진보니 나누고, 심지어 그에 따른 재판전략까지 제시하는 행태주의 법학의 사례들을 거론하는 것은 오히려 과잉에 해당한다. 퇴임 대법관들의 강변에는 자신들이 이리저리 분류되는 것에 반발하기보다, 사법과정에 시민사회가 참여하게 되면서 하급 법관들이 대법원이 내리는 신탁으로부터 독립하여 재판하게 되는 사태를 두려워하는 심리가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속세의 ‘더러운’ 강물들이 하급 법원의 재판과정에 몰려들어 하나의 바다를 이루는 것이 두려운 것이며, 이 바다가 있기에 이루어지는 국민의 ‘법과 정의와 양심’이 그들의 ‘법과 정의와 양심’을 대체하는 것이 불쾌할 따름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퇴임사를 두고 ‘사법독립 저해세력’이니 공정재판을 저해하는 일부 집단이니 하는 일부 논평들의 의도된 오독을 걱정하게 된다. 이들의 퇴임사는 결코 사법부와 시민사회를 향한 쓴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법권력, 더 정확히는 대법원·대법관 권력을 향한 축원이자 축복이었고 시민사회에 대한 영원한 굴종의 강요였을 뿐이었다. 오히려, 저 퇴임사에서 입으로는 초인을 말하면서도 현실에서는 세속의 모든 강물을 거부하였던 저 무수한 압제의 역사들을 새삼 떠올릴 수 있다면, 우리는 아예 5·18을 ‘떳떳이’ 거론하는 한 대법관 취임사로부터 좀더 알찬 사법권 독립을 향한 기대를 엮어낼 수 있지 않을까?

2006-07-14 , 한겨레신문
한상희 건국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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