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어떤 남자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낄 때, 물론 그녀는 기쁘다. 나아가 그 남자가 꽤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거나 게다가 비싼 스포츠카를 타고 있다면 그녀의 기쁨은 더욱더 클 것이다. 그것은 주식시장에서 주가가 올랐다는 소식을 들을 때 느끼는 주주의 기쁨에 비교할 수 있다. 그녀의 눈에 그 남자가 잘 생겼는지, 공감을 주는지, 지성적인지의 여부는 상관이 없다. 주식 쿠폰이 무슨 색으로 인쇄되어 있는가가 주주에게 아무 상관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다른 여자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는 것(여자들이 서로를 평가하는 기준은 남자들보다 훨씬 가혹하기 때문에 이것은 아주 극단적인 상황이다)을 한 여자가 경험했을 때, 그녀는 정상에 도달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을 위해서 그녀는 산다. 인정받기 위해서, 찬사를 위해서, 다른 여자들이 보내오는 '사랑'을 위해서.

-에스테 빌라의 <어리숙한 척 남자부려먹기> 중 '여자들의 낙원 안에 남자는 없다'에서

  이 글을 읽을 때면 전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허드슨강의 모스크바'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이 영화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블랙코미디 영화 '적 그리고 사랑이야기'를 감독한 폴 마줄스키의 또다른 역작입니다. 내용은 냉전시기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망명한 구 소련 국립서커스단의 악사 블라디미르(로빈 윌리암스)가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겪는 슬픔을 블랙코미디로 담아낸 것입니다.
  블라디미르는 망명후 뉴욕에 정착하면서도 혹시 KGB에 의해 다시 잡혀갈까 불안에 떨며 삽니다. 어느 날 뉴욕 거리를 걷던 그는 어떤 남자가 자신을 남몰래 훔쳐보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불안감을 느낀 블라디미르는 그 남자의 미행을 따돌리기 위해 요리조리 도망다니다가 결국 으슥한 골목길에서 그 남자의 멱살을 잡고 묻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군데 나를 미행하는 거요, KGB요?" 남자는 아니라고 답합니다. "그럼 CIA요?" 그는 또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럼 FBI요?" 남자는 역시 고개를 가로 젓습니다. "그럼 도대체 당신의 정체는 뭐요?" 남자는 또박또박 답합니다. "G.A.Y.요."
"G.A.Y.라니 처음 들어보는데 그건 무슨 기관이요?" 남자는 답합니다. "동성애자 gay요." ^^
  남자들은 길거리에서 모르는 남자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유심히 쳐다보는 경험을 한다면 둘 중 하나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저 인간이 내게 뭔가 시비를 걸려는구나' 아니면 드물긴 하지만 '혹시 동성애자 아니야'하고. 그런데 여자들에겐 같은 일이 그처럼 기분좋은 일이라니, 분명 여자와 남자는 종은 같지만 분명히 다른 종류의 동물인 것 같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라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제목을 보면서 저는 영화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상상을 해봅니다.
  에스테 빌라는 그 자신이 여자인데 여자란 존재를 매우 속물적인 존재로 비하시킵니다. 여자는 게으르고 소비지향적이고 멍청하며 남성에 기생하는 존재로 그리고 있으니까요. 일례로 여자가 신문에서 무슨 정치기사를 읽는다면 정치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치학과 남학생에게 접근하려는 의도고, 그리스철학자의 이름을 찾는다면 그리스철학에 관심이 생겨서가 아니라 십자말풀이 놀이의 해답이 필요해서고, 신형자동차 광고를 읽는 것은 첨단 테크닉을 향한 순순한 관심때문이 아니라 그 차를 소유하고 싶어서라는 식이지요. 하지만 여성이란 기생생물은 본능적으로 매우 간교해서 숙주(남자)를 어르고 달래서 자신들이 따분하게 여기는 우주의 신비나 철학에 매달리거나 열심히 생업에 종사케하고 자신들의 관심사인 편안한 소비와 수다를 즐긴다고요.
  농경시대 이후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무자비하게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산업화시대에 들어서는 자신의 일과 더불어 가사를 통해 남성노동력의 재생산까지 아무런 보수없이 떠맡겨져 자본으로부터 이중 착취당한다는 페미니즘적 시각에서는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발상일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생존경쟁력이 뛰어나다'는 진화론적 시각에선 일말의 진실이 담겼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생물이 단세포 생물로부터 인간과 같은 고등생물로 진화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태초에 생명은 원생생물처럼 본디 다세포 생물이었으며 진화는 인간처럼 복잡한 고등생물과 박테리아처럼 보다 단순한 생명 양갈래로 진화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고등생물과 박테리아가 등가의 가치를 가질 수 있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중심적 발상일뿐입니다. 생명체의 가장 큰 목적이 DNA와 같은 유전물질의 확대재생산에 있다는 점에선 박테리아가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경쟁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치명적 여성'이란 뜻의 팜므 파탈(femme fatale)이 영화와 소설에 수없이 등장하는 이유도 남성들의 그런 무의식적 두려움의 반증일 수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강함'과 '복잡함' 보다 '부드러움'과 '단순함'이 더욱 강한 생존력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팜므 파탈이 여성의 성적 매력만을 과장하고, 여성을 어린 아기처럼 의존적 존재인 동시에 남성중심의 세계를 파멸로 이끌지 모를 존재로 타자화한다는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여전히 그 팜므 파탈이 대중문화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또다른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여자는 남자의 미래'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최소한 '여자는 남자의 기회비용'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로버트 프로스트가 '가지 않은 길'에서 읊었던 양갈래의 길 중에서 시인(남성)이 선택하지 않았던 다른 한 갈래 길로서 말입니다.


- 20040427, 동아일보 권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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