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버랜드 편법 증여와 ‘엑스파일’ 사건 등이 불거진 지난 2006년 2월7일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에서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장(맨 왼쪽)과 임원들이 국민에게 사과문을 발표하기에 앞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22일 오전 서울 삼성본관 앞에서 태안 기름유출 사고와 관련해 삼성중공업의 무한책임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사재 등 8천억원을 조건없이 헌납하겠습니다”

2년 전 이맘 때, 삼성그룹은 사회공헌기금 8천억원을 헌납하고 그룹 임직원 이름으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에버랜드 편법 증여, ‘엑스 파일’ 사건 등의 여파로 이건희 회장의 ‘황제 경영’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센 때였다. 당시 삼성은 검찰 수사를 피해 국외에 머물던 이 회장이 귀국한 지 사흘만에 발빠르게 이런 조처를 내놨다.

그러나 삼성은 수만명의 주민들에게 생계 터전을 잃게 한 태안 기름 유출사고에 대해 22일 짧은 사과문 한장을 내놓았다. 사고 발생 47일 만이다. 사과 내용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두루뭉술한 것일 뿐, 과실과 배상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단 한줄도 없다. 총수 일가의 지배권이 위태로울 땐 선뜻 수천억원을 내놓더니, 수만명의 생계 위기엔 침묵하는 삼성의 이중적 태도에 비판이 거센 까닭이다.

그동안 삼성그룹 고위 임원들은 이번 사고와 관련해 “검찰 수사 결과가 나오면 어떻게든 대책을 내놓지 않겠느냐”고 공언해 왔다. 그러나 사과문에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선언적 약속 외에 법적 책임과 주민 지원 계획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사과의 주체도 삼성중공업 임직원 일동으로 ‘격하’됐다. 삼성그룹은 이에 대해 “민·형사상 책임을 가려 이에 따른 보상·배상 범위가 정해지면 성실히 대응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일단 정부가 특별재난지역 지정 등을 통해 주민들을 긴급 지원하고 법적 책임이 가려지면 삼성중공업 등에 구상권을 행사하면 된다는 논리다. 한때 거론됐던 피해 지역 공단 건립 등의 지원 대책은 쏙 들어갔다. 박원석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삼성의 사과문에는 기름 유출사고에 대한 과실이나 주민 지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다”며 “‘버틸 데까지 버티고 나중에는 법대로 하자’는 식의 태도인데, 과연 주민들의 마음을 헤아린 진정한 사과로 볼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삼성의 이런 ‘버티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삼성은 ‘엑스 파일’ 사건이 불거진 2005년 7월에도 섣부른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가 거센 역풍을 맞은 적이 있다. 당시 삼성은 “(도청 녹취록은) 사실과 다르거나 소문에 불과한 것이 있고 내용이 왜곡되거나 과장된 점도 있지만, 이로 인해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고 국민에게 걱정을 끼쳐드린 점 죄송스럽기 그지없다”고 밝혔다. 죄는 인정하지 않지만 어쨌든 사과한다는 식으로 덮으려 했다. 부정적 여론에 밀려 처벌을 받을지도 모를 혐의 사실을 시인할 순 없지 않느냐는 논리였다. 하지만 진정성이 결여된 사과로 ‘삼성 공화국’ 논란이 총수 일가와 후계 구도로까지 번지자, 삼성은 이듬해 전격적인 ‘재산 헌납’ 카드로 비판 여론을 봉합했다.

이번에도 피해 지역 주민과 시민단체들은 삼성의 알맹이 없는 사과문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삼성이 ‘통큰 해법’을 내놓을 것이란 관측도 있었지만, 삼성은 결국 ‘법대로’를 선택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이번 사고의 경우 삼성은 범죄 혐의와 손실 배상 범위를 최소화하겠다는 게 기본적인 태도”라며 “총수 일가가 직접 연루된 특검 수사 결과에 대해서는 삼성이 과연 어떤 대책을 내놓을지 지켜볼 일”이라고 말했다.


2007-01-23, 한겨레신문
김회승 이형섭 기자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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