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대선이 끝난 후 부산에서 같은 회사를 다니던 선배가 물었다. “김 시보도 경상도 뿌리를 가졌으니 김영삼 찍었겠지” 내가 어색하게 고개를 젓자, 그는 깜짝 놀라며 “그럼 정주영 찍었단 말이야”라고 다시 물었다. 당황한 내가 또 고개를 젓자, 그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아하, 박찬종 찍었군. 역시 김 시보는 아직 젊어” 하며 다른 사람들과 선거 이후 정세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박찬종을 찍지 않은 나였지만, 그걸 설명할 기회는 영영 주어지지 않았다. “호남의 김대중 지지율은 공산당 선거하고 똑같지 않냐”며 비아냥거리는 그 분들의 머리 속에 처음부터 기호 2번을 위한 공간은 없었다. 거기에 대항할 논리를 갖추지 못했던 나는 그저 어색한 미소만 짓고 있어야 했다.
  그 후 대구에서 군복무를 하던 중, 서울로 가는 기차 속에서 우연히 강준만 교수의 <전라도 죽이기>를 읽게 되었다. 그야말로 확 깨는 경험이었다. ‘경상도 뿌리’ 탓에 알게 모르게 세뇌되어 왔던 ‘김대중과 전라도’에 대한 깊은 편견에서 벗어나, 영호남 차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준 책이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김대중 죽이기>를 샀고, 뒤이어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그의 글들도 거의 빠짐없이 구해서 읽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지역차별에 대한 나름대로의 논리도 생겼다. 그리고 얼마 전, 별 것 아닌 책 한 권을 쓰면서 나는 다시 한번 강 교수를 생각하게 되었다. 비판의 대상들을 실명으로 표기할 것인지에 대해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하면서였다. 너무 촘촘해서 빠져나갈 틈을 찾기 어려운 대한민국의 인간관계망이 두려웠지만, 결국 나는 10여 년 전에 이미 실명 비판을 시작한 선각자를 생각하며, 이니셜로 대충 피해가고자 하는 비겁한 욕망을 억누를 수 있었다. 얼굴 한번 못 뵈었어도, 그런 의미에서 강 교수는 분명 나의 스승이다.
  그뿐인가. 거대 언론이 우리의 생각을 어떻게 왜곡시켜 왔는지 처음 공론화한 것도, 서울대로 상징되는 난공불락의 학벌 요새를 향해 새총을 쏘기 시작한 것도 강 교수였다. 두 명의 대통령을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고도 그는 공을 나누는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자신의 작업에 대한 용기 있는 반성도 강 교수만이 지닌 강점이었다. 지난 10여년 동안 언론학자로서, 사회개혁가로서 그가 해 온 작업은 ‘눈부시다’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을 찾기 어렵다. 그런 강 교수이지만, 좀 배웠다는 사람들 치고 강 교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를 찾기란 쉽지 않다. 나는 강 교수가 당하는 ‘왕따’야말로 그가 걸어온 길이 옳았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라고 믿는다.
  물론 민주당 분당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억울함을 대신 호소하고자 한 강 교수의 입장은 다수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열린우리당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지적했던 그의 예견은 빗나갔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도 강 교수의 판단착오라기보다는 민주당 지도부가 생존을 위해 선택한 ‘오버’가 낳은 슬픈 반사효과였을 뿐이다. 분당이 어쩔 수 없는 정치적 선택이었다 해도, 이를 “민주화 동지들에 대한 사실상의 인격살인”이라 비판한 강 교수의 뼈아픈 지적까지 힘을 잃는 것은 아니다.
  지난 3월 강 교수는 “자성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라는 말을 남긴 채 신문 칼럼 연재를 중단했다. 이제 우리는 현대사를 ‘산책’하거나, ‘길잡이’를 찾아다니는 강 교수의 책들만을 만나볼 수 있다. 그의 시각으로 역사를 살펴보는 것도 우리의 즐거움이지만, 역시 그가 서 있어야 할 자리는 1940년대가 아니라 2004년의 대한민국이다. 가뜩이나 조로 현상이 심각한 우리 학계다. 편파적인 언론의 행태와 극단적인 편 가르기가 계속되는 현실세계를 벗어나, 그가 너무 빨리 ‘원로’의 자리로 가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다. 나는 오늘도 절차적 공정성을 강조하는 합리적인 중도파 강준만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그가 빨리 21세기의 정치와 언론 현장으로 돌아와 주기를 기대한다.


20040608, 한겨레신문
김두식/한동대 교수·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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