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이 근현대사 ‘대안 교과서’를 내놨다. 기존의 교과서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좌편향 역사인식을 심어준다는 이유로 준비하기 시작한 지 3년 만이다. 내용은 예상했던 대로다. 학자적 양심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념과 목적의식이 객관적 사실과 평가를 압도한다.
주요 내용은 이렇다. 구한말 조선엔 자생적 근대화의 싹도 노력도 없었다. 식민지배를 통해 근대문명이 수입되고 경제성장도 이뤄졌다. 이승만·박정희 체제는 한국에 자유민주주의를 뿌리내리고, 경제발전을 이룩하는 혁명적 계기였다. 요약하면 근대화는 식민지배에서 시작해 독재체제를 통해 완성됐다는 것이다. 광복 뒤 권력의 핵심에서 독재체제를 유지·강화했던 자들이 친일파였던 사실을 생각하면, 이들이 지키려는 가치가 잘 드러난다.

이런 책에 교과서란 말이 붙었으니, 시비와 논란은 피하기 어렵다. 출판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자는 말도 나온다. ‘교과서’란 말이 귀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이를 시비할 생각은 없다. 집필자들은 대부분 경제, 교육윤리, 정치외교학 교수로 역사학 비전공자다. 이들이 역사학계가 인정한 사실과 평가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두고 따지고 싶지 않다. 게다가 이들은 사료의 선택과 해석에서 서툰 차원을 떠나 정파적 이념과 목적에 따라 멋대로 짜깁기했다. 역사를 정치적 선전선동의 수단으로 이용한 셈이다. 거기에 말려들 이유도 없다.

그런데도 이 책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 정치·경제적 배경 때문이다. 지난 정권 때 이들이 펼친 이념공세는, 정권교체 국면에서 막강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지금도 한나라당 등 집권세력과 전경련 등 재계의 뒷받침을 받고 있으며, 보수 족벌언론들의 후원을 업고 있다. 책은 정치 팸플릿 수준이지만, 이런 배경 때문에 사회적 담론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 때문에 분명히해 둘 게 있다. 역사상 전체주의에 맞서는 가장 훌륭한 제도는 민주주의였다. 공산주의와 체제 경쟁에서 승리한 것도 민주적 시장경제였다. 이승만, 박정희가 구축했던 독재체제는 가장 저급한 선택이었다. 아울러 일제지배가 없었더라도 근대화는 이루어졌다. 오히려 분단의 비극을 피할 수 있었다. 이른바 뉴라이트가 지향하는 바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일사불란한 독재인가, 강대국에 대한 자발적 종속인가.


2008-03-25,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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