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걱정했던 일이 그예 벌어지고 있다. 교육은 제발 내버려둬 달라고, 혹여 바꾸더라도 서두르지 말자고 누누이 말했다. 하지만 새 정부 들어서기도 전에 날마다 폭풍, 아니 태풍이 분다. 그 동안 교육 말도 많고 탈도 많았으니 뭔가 해야 한다는 의욕은 당연하다. 그런데 내놓는 정책 방향은 자칫 가뜩이나 어려운 교육을 아예 그르칠 것 같아 위태롭기만 하다.

■ 다시 도진 조령모개 개혁병

무엇보다도 너무 서두른다. 그러다 실수를 거듭하고 하루가 멀다 하고 말을 뒤집거나 내용을 바꾼다. 한국교육의 가장 큰 병폐가 백년대계를 조령모개 식으로 함부로 손보아 왔던 개혁 병인데도 말이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영어교육과 관련된 저간의 법석이다.

지구화 시대 영어는 중요하다. 하지만 온 국민이 목을 맬 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한동안 떠들썩하다 쑥 들어간 '몰입식 영어교육', 곧 다양한 과목 수업을 영어로 하겠다는 발상은 단견과 편견에 매몰된 의식을 잘 드러내 준다.

비판이 거세지자 이번엔 영어교육을 강화하려는 이런 저런 대책이 쏟아진다. 고등학교만 나와도 영어로 의사 소통하는데 불편 없게 하겠다는 목표는 말하기는 쉬워도 이루기 어렵다. 또 꼭 그래야 하는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지금, 여기 우리 교실상황, 교사의 역량 이런 것을 두루 생각해보면 실현성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이런 문제점들이야 다들 얘기하고 있으니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짚어보자. 도대체 왜 온 국민이 다 영어를 잘해야 하는지부터 차분하게 되물어야 한다.

아무리 지구화 시대지만 영어를 모두 잘할 수도 없으려니와, 그럴 필요도 없다. 학문이나 사업 등 꼭 필요한 사람들만 잘 하면 충분하다. 그리고 누군가 잘 지적했듯이 영어를 잘하는 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 영어로 무엇을 말하느냐가 중요하다.

사실 요즘 '글로비쉬'라고 해서 다양한 영어들, 특히 지구촌 사람들끼리 편하게 의사 소통하는 영어에 대한 관심이 높다. 알다시피 영어를 쓰는 나라도 많고 그에 따라 많은 악센트나 표현방식이 있다.

영어 하면 미국식 '꼬부랑말'만 치는 것도 문제다. 발음이 유창하다고 영어를 잘하는 게 아니다. 무얼 내용으로 말하느냐다. 흔히 말하는 콘텐츠 문제다.

충분한 인문적 소양, 의사소통 역량의 개발이 그래서 영어교육 못지않게, 아니 더욱 중요하다. 좀 서툴더라도 적확한 단어와, 풍부한 어휘를 담기만 하면 잘 알아들을 뿐 아니라 인정받는다. 이런 막무가내 방식으로 그런 교육이 되겠는가?

한 가지 더 중요한 게 있다. 어쩌면 지구화 시대 한국사회 앞날이 걸린 가장 중차대한 사안이다. 다름 아닌 지구화 시대 다문화 교육이 그것이다. 이제 지구화는 물건 잘 만들어 지구촌 곳곳에 내다 파는 일을 넘어선 지 오래다.

지구화는 지금, 여기 우리 안에 이미 시작되고 있다. 국제결혼 비율이 제법 높으며, 멀지 않는 앞날에 학생, 청소년의 상당수가 다문화 가정에서 자랄 것이다. 이들과 더불어 살려면 이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배려가 필요하다.

■ 다문화 교육이 더 긴요

그러려면 영어교육 뿐 아니라 교사들이 다양한 문화권의 언어나 문화적 내용을 알아야 하고 또 겪어봐야 한다. 이 교육이 더 급하다. 그런데 아직도 일종의 열등감에 사로잡힌 영어교육에 매달리다니 이렇게 앞뒤가 바뀔 수가 없다. 한마디로 되지도 않을 뿐더러, 해서는 안 될 일을 경쟁력이라는 이름으로 억지와 막무가내로 밀어 붙이는 꼴이다.

어디 그뿐인가. 교육격차에 따른 양극화가 심각한 상황에서 아무리 공교육에서 영어를 강화한다 해도 그것이 상급학교 진학이나 취업의 기준이 된다면 사교육은 번창하고, 서열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이래선 안 된다. 서두르지 말고 무엇이 교육의 본질이며 핵심인지 제대로 짚어야 한다. 그러면서 제발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나가야 한다.


2007-02-01, 한국일보
정유성 서강대 교수·교육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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