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쯤인가, 택시를 타고 시청 앞을 지나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덕수궁 문 앞이 시끌벅적했다. 덕수궁 앞 수문장 교대식이 저렇게 인기가 많았나 싶어서 자세히 들여다봤다. 그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곳에 바로 압구정동 최신 패션 트렌드인 할머니 빨간 내복을 입은 그들, 흥춘이(박휘순)와 오춘이(오지헌)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방송 <개그콘서트> ‘패션 7080’의 강남 멋쟁이 흥춘이와 오춘이는 지난 8월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를 시작으로 놀이공원, 출근길 지하철 강남역, 서울역 대합실, 결혼식장 등에 출몰해왔다.‘패션 7080’ 코너를 통해 공개한 인증샷(진짜라는 증거 사진)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무대나 방송국이 아닌 사람들이 살고 있는 길바닥에 진짜 빨간 내복을 입고 나간 것도 웃겼지만, 이들의 존재에 무심한 듯한(혹은 못 알아보는 듯한) 사진 속 사람들의 표정이 압권이었다.

개그 버전 ‘벌거벗은 임금님’

조명이 켜진 무대 위에서 카메라를 앞에 두고 빨간 내복을 입을 수는 있다. 기껏해야 5분 남짓한 시간 동안 웃기기 위해서라면 못할 분장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흥춘이와 오춘이는 이 빨간 내복을 입고 대기실도 없고 무대와 관객석의 구분도 없는 거리를 활보한다. 카메라와 조명 스태프까지 수십 명이 모여 길 가는 행인들을 막는 식의 야외촬영도 아니다. 디지털 카메라 하나만 달랑 들고 누가 억지로 떠민 것도 아닌데 사람들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개그 버전 ‘내복 입은 흥춘과 오춘’ 정도랄까. 흥춘이와 오춘이의 포토그래퍼 박준형은 이렇게 말한다. “패션의 시작은 이렇게 행동하는 거지. 얘들이 어디로 갈지 아무도 몰라.” 그렇다. 개그의 시작은 이렇게 행동하는 거다. 2006년 하반기 중요한 개그의 코드는 바로 ‘실천하는 개그’다.

‘대빡이의 삼천빡 투어 동영상’이라고 들어나 보셨는지? 삼천배도 아닌, 삼보일배도 아닌 이 삼천빡은 ‘골목대장 마빡이’의 대빡이(김대범)가 이 코너에서 선보인 동작이다. 대빡이는 지난달 이 코너에서 절을 한 다음 이마를 치는 삼천빡을 해보이며 “동영상을 미니홈피에 올리겠다”는 약속을 했다. 곧 그의 미니홈피에는 삼천빡을 하는 동영상이 올라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대빡이가 약속을 지키는 모습에 감동했다는 댓글을 달았다. 감동도 감동이지만 이 동영상을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이유는 대빡이가 캠코더 하나 들고 머리에 대빡이 가발을 쓰고 서울 시내 곳곳을 누볐다는 점이다. 동영상 속에서 대빡이는 흥춘이·오춘이가 그랬듯이 패스트푸드점 계산대 앞에서, 차가 잔뜩 밀린 도로 가운데서 절을 한다. 음악이 잔잔해서 그렇지 자세히 보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게 되는 황당한 시추에이션이다. 실천하는 개그맨 대빡이에게 개그의 무대는 좁은 공개홀이 아니라 드넓은 서울 시내 전체였다.

한국방송 가을 개편과 함께 탄생한 새로운 개그 프로그램 <웃음충전소>에 ‘막무가내 중창단’이라는 코너가 있다. 유상무와 김현숙, 유세윤이 나오는 이 코너는 노래를 하다가 노랫가사와 똑같은 상황을 재연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첫 방송에서 유상무는 ‘자우림’의 ‘일탈’을 시도했다. 미션은 “신도림역 안에서 스트립쇼를”이었고 유상무는 진짜 신도림역으로 가 하나씩 옷을 벗었다. 복작대는 신도림역은 유상무의 스트립쇼로 일시 정지됐다. 두 번째 방송에서 유세윤의 도전곡은 원미연의 <이별여행>이었다. 미션은 “벽에 걸린”. 물론 유세윤은 말 그대로 벽에 걸렸다. 그것도 초등학교 앞 담벼락에 걸렸고 집에 가던 초등학생(일명 무서운 초딩)의 사랑과 비웃음, 놀림을 한 몸에 받았다. 이 코너는 이렇게 무조건 스튜디오 밖으로 나간다. 사람들 속에서 온몸으로 개그를 보여주려고 말이다.

계산대에 마주선 점원과 대빡이

실천하는 개그의 웃음점은 개그맨보다 개그맨을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에 있다. 흥춘이·오춘이의 당당한 표정과 이들에게 관심도 없이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이 충돌하면서 기묘한 그림을 만들어낸다. 삼천빡 동영상도 마찬가지다. 패스트푸드점 계산대 앞에서 경건하게 절을 하는 대빡이와 그런 대빡이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점원이 하나의 공간에 있는 것 자체에서 웃음이 나온다. 비현실적인 개그와 현실 세계의 일상이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장면은 이렇게 예측불허의 웃음을 선사한다. 또 꽉 짜인 무대 위 개그보다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어간 개그에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 이 기사를 쓰면서 한 가지 소원이 생겼다. 덕수궁에서는 비록 지나쳤지만 흥춘이와 오춘이가 신문사를 방문하면 어떨까? 이들을 못 알아보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은 이곳 신문사 편집국에 내복을 입고 앉아서 태연하게 신문 보는 사진, 한번 찍어보시겠습니까? 어디선가 환청이 들린다. “굿굿굿 베리 굿!”

2006년12월13일 제639호
▣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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