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북 동양화가 김용준이 1933년 서울 성북동에 한옥을 짓자 아내가 "무주 구천동 같은 곳엔 왜 왔느냐"고 했다. 뒤뜰에 꿩과 늑대가 들 만큼 성북동은 산골이었다. 1944년 이 집을 산 서양화가 김환기는 "친구들에게 성북동에서 같이 살자고 했지만 아무도 안 왔다. 교통이 불편해서지만 나는 그래서 더 좋다"고 수필에 썼다. 1933년 만해 한용운이 심우장을 짓고 성북동에 들어간 것도 총독부에서 먼 산골로 숨기 위해서였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1968년 김광섭은 성북동 집 마당에서 봄바람을 쐬다 인근 채석장 발파음에 놀라 날아오르는 비둘기 떼를 보고 '성북동 비둘기'를 썼다. 도시화로 황폐해가는 현대인의 삶을 비둘기를 통해 그려 환경·생태 문제를 처음 다룬 시로 꼽힌다.

▶성북동 언덕엔 1970년대 후반부터 고급 주택들이 들어섰다. 몇 년 전 동네 건물에 세든 회사 직원이 소형차를 몰고 다니자 파출소에 "그런 차 못 다니게 해달라"는 민원이 접수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감시카메라가 즐비한 골목엔 '이곳에서 강도·도둑질하면 꼭 잡힌다'는 팻말도 붙었었다. 반면 성북동 초입 성곽 주변 비탈엔 1960년대부터 들어선 낡은 집들이 빼곡했다.

▶1970년대 초 독일대사관이 성북동에 땅을 사 대사관저를 지은 뒤 일본과 호주 대사관이 뒤를 따랐다. 독일 대사관저는 4만㎡, 일본 대사관저도 1만㎡에 이른다. 도심서 가깝고 전망과 환경이 좋다는 소문이 외교가에 퍼지면서 30개국 대사관저가 들어섰다. 소유와 임차가 반반이라고 한다. 그 대사관저들이 많은 골목의 남쪽, 성벽 근처 6만8000㎡가 지난 8월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돼 아파트 21동이 들어서게 됐다.

▶테드 립만 주한 캐나다대사가 최근 성북구청장에게 편지를 보내 "단층집들을 헐고 아파트를 지으면 성곽의 아름다움을 해치고 평화롭고 조용한 성북동이 바뀔 것"이라고 걱정했다. "재개발이 불가피하다면 주민 삶의 질, 성북동의 특색을 감안하고 동네 외교관들 의견을 반영해달라"는 요구도 했다. 이를 두고 "지나친 간섭" "성북동을 걱정하는 조언"으로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한다. 주민들이 재개발로 보다 나은 삶을 찾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의 도시 재개발 방식을 한번쯤 돌아볼 계기는 될 것 같다. 김광섭이 지금 성북동 논란을 보면 뭐라 할까.


2008.12.09
조선일보, 김홍진 논설위원 maile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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