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운상가(사진)가 철거된다. 6,70년대 서울의 스타였던 새로운 건축이 그 명성을 잃고 도심의 흉물로 전락해버린 지도 이미 오래. 종묘와 남산을 잇는 강렬한 축을 건축의 힘으로 연결하고자 했던 젊은 건축가 김수근의 꿈은 이렇게 그 최후를 준비한다.

예전에 포르노 비디오나 팔던 이 흉물이 어째서 근대 건축의 꿈이었죠?

포르노 비디오가 뭐 어때서요?

좋은 건 아니잖아요.

전근대와의 이별을 고하는 육체적 퍼포먼스로 볼 수도 있겠지요.

세운상가(를 비롯한 4개의 주상복합 건물들) 주위의 지도를 보면 아직 조선 시대의 도시구조가 보인다. 지금의 판잣집들이 한옥이나 초가집이었을 당시에 생겨났던 길이 여전히 21세기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차량 통행은 꿈도 못 꾸고 미로 같은데다가 어둡고 음습하다. 세운상가가 있던 자리도 그런 칙칙한 집들이 모여 있던 장소였을 것이다.

그 곳에 거대한 건축이 들어섰다. 기존 도시의 얼개는 생각하지 않았다. 종묘와 남산의 축을 설정하고 그 축을 따라 일정한 폭을 쭈욱 밀어버리고 높은 건물을 세웠다. 마치 어둡고 음습한 전근대와의 이별을 고하듯.

지금은 청계천이 복원되며 그 길이 끊겼지만 세운상가를 비롯한 네 개의 상가는 필로티 구조(1층에 벽체가 없고 기둥으로만 되어 있는 구조)에 의한 상부 데크를 통해 연결되어 있었다. 하부에서는 차량의 통행이 이루어지고 상부에선 보행자들의 천국이 펼쳐진다. 개념적으로 보행을 통해 종묘와 남산의 축이 연결되고 그 공간에서는 상업과 주거의 삶이 펼쳐진다. 3층 높이의 보행자 데크에서는 전근대적인 종로3가 일대의 도시구조가 눈 아래 펼쳐진다. ‘난 너희와 달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건축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건축가의 열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세운상가는 이제 근대 건축이 저지른 실패의 대표적인 사례로 철거된다. 그 자리에는 녹지로 이루어진 공원이 들어설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세운상가가 너무도 아깝다. 실패한 건축은 왜 남아있을 수가 없는 것일까? 실패한 건축물의 모습을 보며 서울이 지닌 역사의 한 시기를 반추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과연 실패한 꿈은 잊혀야 하는 것일까?

나는 아마도 인터넷으로 야동을 보는 시대에 포르노 비디오테이프 따위를 추억하는 전근대적인 사람인가보다. 하지만 그렇다할지라도 실패마저 당당하게 기억하는 도시가 어쩌면 더 건강한 도시일 것 같다는 생각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2008-08-06, 한겨레신문
오영욱/ 건축가·오기사디자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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