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인터뷰

지난 7일 오후 4시께 2800여쪽의 세 권짜리 책이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의 한 사무실로 배달돼 왔다. 안경을 콧등에 얹고 있던 임헌영(68)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이 책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담담하게 “큰 산을 넘었어”라고 말했다. 8년을 기다려 온 <친일인명사전>을 임 소장은 그렇게 처음 마주했다. 그는 2001년 연구소 부소장으로 이 사전의 편찬 작업을 시작했다.

책이 나온 뒤 보수 성향의 신문들은 사설을 통해 “대한민국 정통성을 훼손했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보수 시민단체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이에 대해 임 소장은 <한겨레>와 만나 “우선 책을 봐달라. 다 보고도 비판할 수 있을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자신의 영달을 위해 친일을 한 인물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남기는 학문 활동을 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8년 동안의 대장정을 끝낸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특정 인사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외세에 시달린 우리 근대 100년을 다루고자 했다. 큰일을 마치고 나면 뿌듯함과 함께 허전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큰 산 하나를 넘자마자 또다른 ‘역사의 산’에 도전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앞선다.”

-‘역사는 힘 있는 자의 논리’라는 말도 있다. 민간단체로서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단 한 번도 쉬운 적이 없었다. 우리는 결코 정치적인 연구소가 아님에도 정당하게 확보한 연구비조차 깎이는 경우가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라는 이름만으로 비토의 대상이 될 때는 암담했다. 하지만 2004년 시민들이 7억원의 성금을 마련해준 게 전화위복이 됐다.”

-연구소는 ‘학술 자료로 봐달라’고 하지만 정치적 의도가 담겼다는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 사전을 학문적으로 봐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민족을 사랑하는 학자들의 지혜가 집대성된 것이다. 어떤 학자들의 모임도 이런 일을 해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조차 문제 삼지 않았던 인물도 사전에 이름이 올랐다.

“만약 1948년 당시 반민특위가 우리의 자료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들이 대상자에서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보수 성향 일부 언론의 창립자나 고위 간부를 ‘의도적으로’ 사전에 올렸다는 지적도 있다. 공과가 모두 있을 텐데 한쪽만 강조한 것은 아닌가?

“김성수와 방응모가 ‘언론 사주’라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들이 ‘권력’을 업고 친일을 했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선 친일, 후 항일’의 경우와 달리, 김성수처럼 ‘선 항일, 후 친일’은 분명히 책임이 있다고 봤다. 근거가 없다는 주장도 있는데, 방응모의 경우, 고사기관총 헌납비 1600원(현 시세 2500만원)을 냈다는 기록이 1934년 발행된 <애국> 제3호 95쪽에 실렸다. 김성수가 국방헌금 1000원을 낸 사실도 1937년 <매일신보> 8월14일치 3면에 실렸다고 근거를 밝혔다.”

-일부에선 ‘조국 광복운동에 손가락 하나 담근 적 없는 정체불명의 인사들’이 당시 인물들을 재단하려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정체불명’이라는 것은 뒤에 숨어 남의 얘기를 할 때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와 문학 등 각계에서 이미 권위를 인정받은 박사 학위 이상의 학자들로 구성돼 있다. 이성을 잃은 표현일 뿐이다.”

-보수 언론들이 사설을 통해 ‘대한민국 정통성을 갉아먹는다’고 지적했는데?

“그런 말을 하는 언론들은 창간 때마다 스스로를 ‘민족언론’, ‘민족지’라고 얘기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객관적인 자료를 근거로 반박해야지, 사설로 우리를 비난하는 게 옳은가. 민족지 정신이 남아 있다면, 알고 있는 진실을 내놓고 머리를 맞대 일제의 잔재 청산을 도와야 하는 게 아닌가?”

-광복된 지 60년이 넘었다. 이제 와 친일 행적을 따진다는 것이 득보다 실이 많다는 주장도 있다.

“유럽은 똑같이 전쟁을 벌였음에도 지금 평화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는 여전히 불안하다. 왜일까? 전쟁 주축국이었던 일본에서 수십년간 정권 교체가 되지 않았던 게 큰 원인이다. 일본이 과거 청산을 하지 않으면 동아시아의 평화도 없다. 이 책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책임을 묻고 따져 반성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최근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주국군 복무가 친일 행적이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군은 국민을 지키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다. 박 전 대통령이 보낸 ‘친일 혈서’의 의도와, 동봉한 편지에서 ‘조국’은 어디인가?”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낸 친일 인사는 사전에 언급되지 않았다며 형평성을 문제 삼는 이들도 있다.

“우리 민족이라면 남북의 기준은 똑같다. 자료가 있다면 예외는 없다. 북쪽은 우리와 달리 해방 뒤 친일 행위자에 대한 숙청이 이뤄졌다는 차이도 있을 것이다. 사전을 보았다면 그런 얘기를 할 수 없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5년까지 일제협력단체 사전 4권, 식민지통치기구 사전 1권, 자료집 4권 등 ‘친일문제연구총서’(총 17권)를 완간할 계획이다. 임 소장은 “이 사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올바르게 사는 게 뭐냐, 올바르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냐’를 깨닫고, 한국 사회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기준을 제시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을 맺었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
2009-11-10,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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