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표적 시민운동가 박원순씨가 국가정보원으로부터 2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했다. 박씨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진보적 시민단체 참여연대를 이끌었던 사람으로, 참여연대를 떠난 뒤에는 아름다운재단,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 등 탈정치적 시민운동의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도 서울시장 시절 4년 월급 전액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한 바 있다.
국정원이 박씨 개인과 주변을 사찰하고 후원 기업을 압박하고 있다는 사찰 의혹이 나왔을 때 국가가 바로 해야 할 일은 박씨에게 소송을 거는 것이 아니라, 국정원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이러한 불법행위가 정말 있었는지 감찰하고 그 진상을 밝히는 것이다. 청와대와 국정원은 이런 조사를 얼마나 철저히 수행하였는지 궁금하다. 한편 박씨가 일정한 근거를 가지고 국정원의 사찰 의혹을 제기한 것이 국가의 명예를 훼손한 불법행위라는 주장은 법리적으로 가당찮다. 민주주의 국가는 시민의 표현의 자유 행사를 통하여 국가의 명예가 훼손될 것을 애초에 예정한다. 만약 정부 비판을 이유로 시민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표현의 자유는 휴짓조각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러한 소송 자체가 대한민국의 망신을 초래하는 ‘명예훼손’이며, 법원은 이 소를 각하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이제 와서 ‘원고 대한민국’은 왜 ‘피고 박원순’에게 민사소송이라는 무리수를 두었을까? 이명박 대통령의 오랜 실세 측근인 원세훈씨가 수장으로 있는 국가정보원이 박씨를 타깃으로 소송을 제기할 때 청와대와 교감이 없을 수 없었을 것인데, 이 대통령은 왜 이 소송을 묵인했을까? 거기에는 비법률적인 판단이 깔려 있다고 추정한다.

첫째, 박원순씨가 인물 부재로 고통 받는 야권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국적·대중적 명망, 정책적 대안제시 능력, 소통과 조직능력 등을 갖추고 있다. 그가 더 크기 전에 치자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래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를 흠집내거나 위축시키거나 골탕 먹이자고 마음먹었을 것이다.

둘째, 박씨 외에 많은 정부 비판자를 겁박하기 위해서이다. 형사처벌을 받는 범죄로 구속하고 수사하는 것과 별도로, 정부 비판을 하면 월급과 예금과 집을 빼앗겠다고 으르는 것이다. 근래 미네르바 판결,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 판결 등의 형사재판에서 잇따라 무죄가 나오자, 이제 민사재판을 활용하겠다는 의사표명이다.

셋째, 시민사회단체의 후원자, 특히 기업들에 경고를 보내기 위함이다. 이번 소송 제기로 정부는 박씨 등 시민사회 활동가와 단체는 정부의 ‘적’임을 만방에 공표하였다. 이제 정부가 기업을 직접 접촉하지 않더라도 기업들은 정부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앞으로 기업은 정부 비판 성향이 조금이라도 있는 단체 후원을 극도로 꺼리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번 소송이 법원에서 심리를 거쳐 정부가 패소하더라도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회심의 미소를 지을 것이다. 이상의 현실은 이명박표 법치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치는 국가권력과 그 담당자들이 헌법과 법률의 요청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원리다. 그런데 현 정부의 법치론은 시민에게 실정법에 대한 무조건 복종을 요구하고, 시민의 헌법상 기본권 행사도 법으로 견제·통제하고 실정법으로부터의 사소한 일탈도 법을 사용하여 진압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왜곡된 법치에 기초한 통치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 역사의 경험이자 교훈이다.


2009-09-20, 한겨레신문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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