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와 방송통신위원회가 케이티·에스케이·엘지 등 통신 3사의 임원들을 불러 한국디지털미디어산업협회에 100억원에서 50억원의 출연금을 낼 것을 요구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들 회사는 지난해 10월 협회 창립 때와 올해 초에도 이미 20억원씩 돈을 모아 냈다고 한다. 그런데도 또 거액을 내놓으라고 방송통신위원회의 주무과장이 요구하고, 기업들이 난색을 표하자 청와대의 담당 행정관까지 나서서 기업을 압박했다는 것이다. 그 행태가 세금 거두듯 이런저런 명목으로 기업한테서 돈을 뜯었던 과거 권위주의 정권 때와 다르지 않다.
청와대와 정부가 나서서 뒷배를 봐준 한국디지털미디어산업협회는 민간 이익단체에 지나지 않는다.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인터넷티브이(IPTV) 상용화 등 방송·통신 융합형 차세대 미디어의 발전과 관련 산업 활성화를 내세웠지만, 관련 업계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활동을 주요 목적으로 삼는 단체다. 그런 단체의 자금 조성까지 정부가 대신 팔 걷어붙이고 나선 것은 결단코 있어선 안 될 일이다. 정부가 기업의 돈 씀씀이를 제멋대로 간섭하는 것이고, 업계 자율기구의 운영과 활동까지 뜻대로 쥐락펴락하겠다는 꼴이니 말이다. 방통위가 그리한 것부터 주무관청의 관리·감독으로 볼 수 없는 일탈이지만, 청와대까지 나섰으니 그 배경과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뭐가 잘못이냐는 태도를 보였다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디지털미디어산업협회의 회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언론특보 출신으로, 정권 내에서 실세로 꼽힌다는 김인규씨다. 경기침체와 사업부진으로 고전하는 기업들이 청와대와 정부의 돈 요구를 딱 잘라 뿌리치지 못했던 것도 그런 ‘정권 실세’의 영향력을 의식한 때문일 것이다. 정권 실세가 달라고 하는데 안 주고 버틸 수 있느냐는 한탄은, 과거 정권에서 비리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기업인들이 자주 했던 말이다. 이번에도 그런 말이 흘러나온다니, 정권 차원에서 불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중에 방송통신위원장이 될지도 모를 정권 실세의 성공을 위해 기업의 어려움은 아랑곳하지 않고 윽박지르는 방통위와 청와대 관료들의 행태 역시 정부 기강 확립 차원에서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이다. 기업 윽박지르기를 당장 중단하고, 경위를 조사해 관련자들의 잘못을 따지고 엄중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2009-10-07,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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