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했던 앙코르 제국을 건설하고 호령하던 크메르의 후예 캄보디아는
불과 30여년 전 씻을 수 없는 두 번의 비극을 당한다.

베트남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69년에서 1973년.
미국 공군은 베트남과 국경을 대고 있는 캄보디아에 대해 치사한 폭격을 한다.
지금도 세계적 석학이라며 위세를 떨치고 있고 당시 국가안보회의를 주도했던 안보 고문 헨리 키신저는
미국 의회가 캄보디아에 대한 미국 공군의 비밀 폭격을 알아챘을 때
캄보디아에 대한 폭격이 아닌 캄보디아에 거점을 두고 있는 베트콩에 대한 폭격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전쟁선포도 하지 않았고 베트남 전쟁과 관련이 없던 중립국 캄보디아에서는 민간인 60만~80만명이 죽어 나갔다.
미국 의회에 대한 보고의무가 전혀 지켜지지 않았고, 따라서 공습경보도 없이 캄보디아는 비밀스럽고 치사하게 폭격 당했다.
“캄보디아 폭격 임무를 안고 날아갔으나 어디에도 군사 목표물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 결혼식장을 목표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캄보디아 불법폭격을 고발한 도널드 도슨(당시 공군 대위, B-52 부조종사)을
미국은 1973년 6월19일 폭격명령 거부죄로 법정에 세웠다.
미국의 군사자료를 통해 1969~1973년 사이에 미국은 B-52 전략폭격기를 동원해
캄보디아에 무려 53만9129t에 이르는 각종 폭탄을 투하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총량 16만t을 3배나 웃도는 엄청난 양이었고,
파괴력은 히로시마 핵폭탄 25배를 웃도는 것이었다.
그렇게 캄보디아에 퍼부은 폭탄이 불바다를 만드는 네이팜탄이었고, 고엽제로 자손 대대 치명상을 입히는 에이전트 오렌지였고,
수백개 새끼탄을 까며 시민들을 살해한 클러스터밤(CBU)이었다.
1957년 제네바협약을 송두리째 위반한 이 폭탄들은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말썽이 나자 자취를 감췄지만,
클러스터밤만은 여전히 걸프전과 코소보전, 최근 아프가니스탄전에서도 악명을 떨치며 아이들을 무차별 살해했다.

1975년 4월17일 폴 포트(1925~1998)가 이끌던 캄보디아 공산당인 크메르루주가 미국의 후원을 받고 있는 론놀 정권의 우파정권을 몰아낸다.
폴 포트와 크메르루즈는 집권 4년 동안 수십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른바 ‘킬링필드’를 저지른 혐의를 받으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과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아왔다.
킬링필드는 1975년부터 집권한 크메르루주가 숙청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집단학살이다.
크메르루주 집권 동안 최대 30만 명에 달하는 지식인과 시민이 처형됐고 굶주림과 강제 노역을 포함해 모두 170만 명이 숨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당시 캄보디아 인구 800만명 중 200만명이 죽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 숫자에 대해서는 총인구의 4분의 1이 죽은 엄청난 학살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정말로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학살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200만명이 죽었다는 근거가 되는 것이 진 라코처가 쓴 <이어 제로>(Year Zero, cited Pol Pot official)라는 책이다.
하지만 진 라코처는 그가 주장한 200만명의 근거를 추궁받게 됐을 때
스스로 그 수를 조작한 것이라 해명하는 촌극을 벌였다.
그래도 지금까지 그 책은 크메르 루주가 200만명을 죽였다는 전설, 그 공식적인 자료로 통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크메르루주에 의한 희생자 수를 부풀리려는 의도는
미국의 폭격에 의한 민간인 60~80만명의 죽음을 덮으려는 술책으로 볼 수도 있다.

1997년부터 미국과 캄보디아를 주축으로 한 국제사회는 학살범들을 처단하는 국제재판을 준비해왔고
유엔과 캄보디아 정부는 2000년에 크메르루주 학살자에 대한 국제재판소 설치에 합의한 바 있으나
정치적 흥정을 하느라 시간만 허비했을 뿐 제대로 재판 한 번 하지 못했다.
킬링필드 학살재판을 통해 취약한 정치적 합법성을 국내외로부터 인정받겠다는 캄보디아 전직 총리 훈센의 야심과
폴 포트가 아닌 미국이 저지른 킬링필드에 종지부를 찍어 모든 의심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미국의 속셈이 교묘히 뒤섞였다.
미국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들이 저지른 1969년부터 1973년까지의 킬링필드를 국제재판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1984년에 개봉한 영화 킬링필드(The Killing Fields)에서 마지막에 존 레넌의 Imagine이 흘러나올 때
사람들은 많은 눈물을 흘렸고 캄보디아와 그들의 비극의 역사는
영화 한 편이 역사교과서 구실을 하게 됐다.
영화가 알려주지 못한 진실과, 영화가 잘못 알려준 진실이 너무도 많고
킬링필드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20051225, 캄보디아 씨엠립(Siem Reap, Kingdom of Cambodia)
Nikon F3hp, Nikkor 24mm/F2.8, Fuji Rea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