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에서 나온 사실들의 확인은 수사관의 몫이다. 그러나 삼성의 역사를 염두에 두면 그가 제시한 거시적 그림은 알려진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결론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삼성의 자본 축적이 대한민국 모든 자원들의 무제한적 이용이라는 상황에서만 가능했던 것이고, 삼성은 대한민국 관벌 엘리트의 ‘이복형제’로 자라온 것이다. 1980년대 말의 ‘민주화’가 가져다준 변화는, 그 전까지 삼성은 독재 권력과의 관계에서 하급 파트너였지만 그 후로 사법부와 행정부·언론·시민단체 등으로 분산된 권력을 쉽게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이라는 점일 것이다. 대한민국 권력층의 총아로 자라온 삼성은 이제 ‘부모’ 위에 군림하게 됐다.
삼성이 지금 같은 위치에 오를 수 있는 바탕은 1950년대에 만들어졌다. 그때에 삼성은 수입대체 산업화에 뛰어들어 제일제당과 제일모직 등을 설립해 소비재 시장에서 큰 몫을 선점하게 되었다. 큰 비용이 드는 원료와 기술 수입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달러가 귀했던 시절 제일제당이 정부의 특별융자 18만달러로 설비기계를 구입할 수 있었으며, 제일모직 역시 관련 부서의 ‘안내’로 미국 원조 100만달러를 얻었다. 제일모직에 5억환을 대부토록 해준 부흥부 장관의 결정을 언론이 그때 ‘특혜’라 비판했고, 제일모직의 수익을 위해 정부가 관련 품목의 수입금지 조처를 한 것을 미국 대사관에서 탐탁잖게 여길 정도였다. 이승만 정부는 이런 무리수들을 둘 만큼 삼성과 ‘특별한 관계’를 가졌다. 이 관계는 1공의 몰락과 박정희 쿠데타로 잠시 혼란에 빠졌지만 박정희 독재의 안정화에 따라 곧 복원됐다. 박정희 정권의 의도와 달리 삼성은 투자비용이 막대한 중화학 부문보다는 이윤율이 안정적이었던 전자부문과 내수부문(생명보험·부동산·백화점·호텔 등) 확충에 치중했지만, 박정희의 도움으로 기존 전자업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설립된 삼성전자의 사례에서 보듯이 결정적 순간에 정권에 기댈 수 있었다. 80년대에도 정부의 방조 속에서 삼성의 문어발식 ‘다변화’가 지속되는 동시에 전두환·노태우 정권에 천문학적 액수의 정치자금이 삼성으로부터 상납됐다. 독재시절의 대한민국을 모태로 하여 경영권 세습은 가능해도 노조 만들기가 불가능한 ‘독재 속의 독재’가 탄생된 셈이었다.

20년 전부터의 형식적 민주화는 삼성 내부 구조에 별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다. 근로자 단결의 자유가 헌법적으로 보장된 권리임에도 ‘무노조 경영’을 행정부도 사법부도 문제 삼는 일은 없었다. 반대로 삼성으로부터 ‘위치 추적’을 당한 삼성일반노조의 김성환 위원장이 ‘명예 훼손’으로 감옥을 가게 됐다. 상당부분은 입증이 가능한 사실에 기반을 둔 삼성의 노조 탄압에 대한 그의 비판이 ‘명예 훼손’으로 단죄됐을 때 언론과 유명 사회단체를 비롯한 대한민국의 ‘주류’는 침묵을 지켰다. 나아가 의료의 시장화와 의료보험 민영화 등 삼성이 생산하는 담론들의 상당부분을 정부도 친화적으로 받아들이는 등 삼성이 민주화되는 대신, 대한민국 전체가 ‘삼성화’되는 듯한 느낌이다.

여론조사들의 결과를 보면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으로 이건희 회장이 자주 거론된다. ‘각하’가 그 의미를 잃어도 ‘회장님’은 그대로 남아 있는 시대에 삼성은 우리들의 마음까지 ‘관리’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만약 시민사회가 세습경영의 철폐와 노조설립을 비롯한 ‘삼성의 민주화’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한다면 민주화의 성과들이 적잖은 위협을 받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2007-11-29,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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