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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복개돼 없지만 예전엔 성균관을 둘러싸고 동서 양쪽으로 흐르는 개울이 있었다.
이 개울을 반수(泮水)라고 불렀다.
개울물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반성하라고 했던 공자의 말씀이 유래다.
그래서 성균관을 반궁(泮宮)이라고도 불렀고,
반수의 건너편 마을은 반촌(泮村)이라고 불렀고 반촌이 있던 곳이 지금의 대학로 주변이다.
반촌에는 성균관의 일을 하는 노비들이 모여 살았다.
국립대학이자 고위관료 양성소였던 성균관으로 모여든 유생들은
성균관의 기숙사인 동재, 서재에도 거처를 정했지만 지금의 하숙집처럼 반촌에도 살았다고 한다.
지금의 대학가와 비슷한 곳이 조선시대 성균관 앞에 있었던 것이다.
반촌의 주민들은 비록 노비 신분이긴 했으나 성균관의 일을 한다는 자부심은 대단했다고 한다.
또한 장차 고위 관료가 될 유생들과 그들의 수발을 드는 노비들은
비록 서로 다른 신분으로 서로가 구분지어져 있었고 그것이 현실이었지만
상호존중의 가치가 살아 있었고 그것이 조선 후기로 이어져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승훈 등과 함께 천주실의 같은 천주교 책을 만들어 세상을 바꾸고자 했을 때에도
친하게 지내던 노비들의 도움이 컸다는 일화가 있다.
영조 때에는 한 도적이 반촌에 숨어들어 포도청에서 도적을 잡으러 반촌까지 쫒아왔는데
대성전 같은 곳에 성현들을 모시고 있는 신성한 성균관의 반촌에 들어와 소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포도대장이 파직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으로 치면 반촌은 치외법권 지역과 같은 곳이었던 셈이다.
현대에 들어서 많은 문인, 연극인, 예술인 등이 성균관과 대학로 주변 혜화동, 동숭동 같은 곳에 살게 된 것은
반촌의 유래와 관련이 있다고 봐야할 것 같다.
이렇게 보면, 일제가 경성제국대학을 왜 반촌 자리에 세웠는지 짐작이 간다.
그렇게 해서 비록 경성제국대학이 반촌의 상당한 땅 위에 자리 잡게 되고
경성제국대학이 서울대로 이름이 바뀌어 대학로라는 이름도 생기게 됐지만
지금의 대학로는 성균관과 반촌의 기운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강남역이나, 신촌 등등과 같이 싸구려, 저급한 문화가 판치는 동네와는 분명 다르다.
최근에는 일부 코미디언들이 무대와 소극장을 넘보고
나이트 삐끼처럼 길거리를 어지럽히긴 해도
오랫동안 그래왔고 아직까지도 대학로는 순수 예술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술집, 노래방이 대학로에도 있지만, 그것들도 저급하진 않고 나름대로 기품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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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AX G1, G45, Fuji Rea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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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kon F100, Nikkor 50mm/F1.4D, Fuji Rea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