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후원은 한때 "비원(秘苑)"으로 축소·왜곡되어 불려지기도 했으나,
1990년대 대대적인 복원을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조선시대 궁궐의 후원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궁궐이 창덕궁이다.
부용지(芙蓉池) 입구는 그 창덕궁 후원의 초입에 해당한다.
이곳에서부터 창덕궁 후원이 시작된다.
창덕궁 부용지 일대는 조선후기 궁궐 후원의 백미로 꼽힌다.
부용지는 가로 29.4m 세로 34.5m 이며, 네모난 연못 가운데에 둥근 섬이 있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전통적인 우주관을 구현한 것이다.





부용지의 남쪽에는 아담한 부용정(芙蓉亭)이 부용지에 발을 담고 있다.
'궁궐지'에 따르면 부용정은 숙종 33년(1707) 건립되었다.
당시의 이름은 택수재(澤水齋)였으나, 정조 16년(1792)에 현재의 부용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부용지를 중심으로 바라볼 때 북쪽에는 2층 규모의 웅장한 주합루(宙合樓)가 높은 단 위에 조성돼 있다.
'궁궐지'에 의하면 규장각은 정조 즉위년(1776)에 이곳에 세워져 처음엔 어진을 봉안했다고 하며,
주합루는 규장각의 위층에 있고 주합루 현판은 정조의 어필이라고 적고 있다.
현재 부용지를 내려다 보며 웅장하게 지어져 있는 2층 건물에는 주합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주합루는 이층 누마루를 가르키는 것이고 1층은 규장각이다.
규장각은 정조가 탕평책을 추진하던 무렵 세운 기구이다.
숙종 때 왕실 족보 등을 보관하는 작은 건물이었으나
정조 때 이르러 그 규모도 커지고 기능과 역할이 확대된 것이다.
즉 규장각은 정조 당시 국내외 도서들을 모아 왕립 도서관의 역할은 물론,
인재를 등용해 국가정책 연구와 왕의 비서실 역할까지를 담당했던 기구로 발전시킨 것이다.
궁궐의 후원은 단지 휴식기능만 갖춘 것이 아니라 국정업무수행을 위한 생산적인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시기에 이곳은 이토 히로부미가 연회장으로 활용하는 등 왜곡과 수난을 겪어야 했다.
이곳 규장각 소장 도서는 일제 시기에 경성제국대학으로 이전되었으며,
다행히 일본으로 반출되지는 않았으나
우리는 소장 도서들을 해방 이후 현재까지도
경성제국대학에서 이름만 바뀐 서울대학교에 보관해옴으로써
치욕의 역사를 끝내지 못하고 있다.










20050625
Nikon F3hp, Nikkor 105mm/F1.8, Nikkor 24mm/F2.8, Fuji Reala